회상이나 미래는 꿈을 꾸는 성향이 있고 보다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3월까지는 어쩔 수 없이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된다.
작년에도 이 일을 겪었다.
올해 다시 마주한다고 익숙해질만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서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이 삶이다.
이왕에 이렇게 된 것 치열하게 고민해보고자 한다.
어쩌면 그럴 수 있는 중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좀 중2 스럽기도 하지만..ㅋㅋ
이렇게 삶을 돌아보고 내다볼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잘 살아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그저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내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의미를 탐구하고 있기에 자꾸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런 고민은 모종의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것이 아닐까.
나의 영향력이 의미있다고 믿기 때문에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일조하고 싶은 마음이지 않을까.
인간으로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젊은이란 너그러운 것이니까.
한국 사회가 특히 강조하는 치명적인 콤플렉스 중 하나가 나이 콤플렉스라고 한다.
'00살에는 당연히 00해야하는 것 아냐?'
'나잇값을 해야지'
그러한 말들을 우리는 매년 듣는다.
어쩌면 나에게는 그 말들이 남다른 무게를 갖고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어린 동생이 삶 속으로 들어오면서 나는 무릇 나잇값을 해야했다.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 생활 속에서 '막내'라는 포지션은 나에게 꽤나 큰 즐거움이었다.
실수를 해도 괜찮고 당차게 무엇인가 도전해볼 수 있는 젊음.
주변 어른들이 수용해주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도 너그러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나보다 나이든 사람보다 어린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모종의 조급함을 느꼈다.
아직 나는 온전히 무르익지 않았는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이루지도 못했는데 벌써 책임감을 묻는 나이가 된 것 같았다.
주변의 어른들을 곰곰이 돌아보았다.
그전에는 어린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배움을 청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이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그 자리에 가까워지고 나서 보니 이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 이면에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아직은 배워가고 있음이 누가 보아도 확실하다.
왠지모를 조급함은 어찌 해결해야 할까.
해결할 수는 있는 것일까.
어쩌면, 애초에 해결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한다.
이제 내 앞에는 인생이 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아직도 일구어내는 행위보다 준비하는 행위가 더 익숙하다.
그런 준비의 과정 속에서 무언가 숨이 막힌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막상 일구어내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조금은 두려움이 앞선다.
그 또한 일구어내기 보다는 무언가 준비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이 준비의 과정이 언제 끝날까.
그 끝에는 또 어떤 준비의 과정이 남아 있을까.
나는 도대체 언제까지 준비를 해야할까.
사람들은 어떻게 그 모든 것들을 영위하며 사는 거지?
어떻게 생각하면 오늘 하루도 일구어내는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위해 투자하고 희생한다기 보다 그 순간의 존재 자체가 목적이 된다.
그렇다.
내 앞에는 인생이 있다.
그 순간들에서 인생이 이해될 때는 아주 드물지만,
인생은 보이지 않는 연관성들로 점철된 심오하고 필연적인 단일체로 나타났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 순간의 그 선택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을까.
만약 그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쩌면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서 그 경험들이 존재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삶의 다양한 순간을 마주할 때 (그것이 그 순간에 띄는 중요성과 관계없이) 그 경험을 최선을 다해 만끽하려 한다.
앞으로도 그래야겠다.
그들은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 일상적이고 진부한 문제들을 서로 상의했다.
제목에 이끌려 집어든 이 책을 나는 놓을 수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바로 여러 개의 자아상이 부딪칠 때였다.
나 또한 그 생각을 수도 없이 해봤기 때문에.
이정도면 열정적이거나 바람직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때로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나태한 것은 아닐까, 내가 삶에게 비겁한 변명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때로는 내가 너무나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사람인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 차페크는 자아를 집에 비유했다.
여러 개의 자아상이 공존하면서 좀 더 목소리 큰 자아상이 주도권을 갖는 곳.
때로는 새로운 인물이 집에 들어와 머물다 가기도 하는 그런 곳.
그 비유가 큰 충격이었고 크게 와닿았다.
그 비유는 나에게 상당한 위로였다.
그래, 한 단어로 나를 정리할 필요는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이제 나를 조금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나다.
내 안의 모든 삶에게 작은 이해와 위로와 사랑을 보낸다.
'이것 저것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 매트 헤이그 (1) | 2025.02.02 |
---|---|
감정의 색깔 / 김병수 (0) | 2025.01.21 |
아들러의 인간 이해 / 알프레드 아들러 (1) | 2024.12.24 |
댓글